◇국가적 제도 속에서 완성해 가는 진정한 기술 환원
대한민국 패션의 이면에서 특수 피혁 가공은 오랫동안 ‘철저한 비밀의 영역’이었다. 염색의 배합 비율, 원피를 다루는 손끝의 감각 같은 노하우는 오직 스승이 제자의 등 뒤로 흘려보내는 도제식 방식을 통해서만, 그것도 극소수에게만 전해지는 그들만의 ‘성역’이었다. 기술을 쥐고 있는 자가 곧 권력이던 시대, 그 장막을 걷어내겠다고 나선 이들이 과연 몇이나 되었을까.
이 오랜 관습에 정면으로 메스를 대고 있는 이가 있다. 핸드백 제조 분야 최초의 ‘서울명장’으로 이름을 알린 호미가의 정윤호 대표다.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이 발표한 ‘2026년도 숙련기술전수자’ 명단에 그의 이름이 공식적으로 올랐다. 전통가죽가공기능 부문에서 정윤호 대표가 공식 숙련기술 전수자로 최종 선정되며, 향후 5년간 자신의 노하우를 본격적으로 대물림하는 대장정에 돌입한 것이다.
이번 선정은 개인이 국가로부터 공인받은 훈장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말로만 외치던 ‘후배 양성’을 행정적·제도적 틀 속으로 끌어들여, 독점하던 노하우를 사회적 자산으로 환원하겠다는 약속을 현실로 옮겨낸 쾌거다.
◇‘밀실’의 기술을 ‘광장’으로 꺼내다
정 대표는 그동안 사내에 별도의 공간을 마련해 젊은 기술자들을 지도해 왔다. 가죽을 다루는 이들이 스스로를 캔버스 위에 혼을 불어넣는 창작자로 여기도록 판을 깔아주는 데 집중했다. 자신이 40년간 온몸으로 부딪치며 체득한 시행착오와 공정의 노하우를 아낌없이 나누는 그의 행보는 기존의 수직적이고 폐쇄적인 도제식 교육과는 결이 다르다.
“기술을 독점하고 숨겨두면 당장은 내 자리가 안전해 보일지 몰라도, 결국 한국 패션 제조 생태계 전체의 숨통을 끊어놓는 일이다. 나 혼자 잘나서 만든 브랜드가 아니라, 이 땅에서 함께 가죽을 만지는 이들의 손끝이 여물어야 한국적 명품의 생명력이 비로소 깊이를 더한다”
실제 정 대표의 작업실에서 이뤄지는 전수 과정은 평이한 이론 교육이 아니다. 원피의 등급을 판별하는 눈썰미부터 온도와 습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염색 공정의 미세한 오차까지, 현장에서 부딪치며 체득해야 할 실전 감각들이 가감 없이 공유된다. 스승의 가르침을 일방적으로 받아 적는 것만이 아니라, 후배 기술자들이 직접 가죽을 만지며 자신만의 공정을 체득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방식이다. 이 과정은 단편적인 기술 대물림을 거부하고 젊은 기술자들이 스스로 고민하고 성장하는 자생력을 길러준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더욱 깊다.
◇손끝에서 피어나는 진짜 가치, 그리고 지속 가능한 미래
기술이 곧 생명이 되는 제조 현장에서 노하우를 공유한다는 것은 자신의 무기를 내어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정 대표가 이 길을 고집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개인이 가진 숙련도가 탄탄한 제도의 손을 잡고 산업 전반의 자양분이 될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명장’이 완성된다는 믿음 때문이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뒤편에서 세대를 거듭하며 축적되는 이 묵직한 축적의 힘이야말로, 한국 제조 현장이 가장 시급하게 회복해야 할 진짜 경쟁력이다.
그의 행보는 화려한 런웨이나 마케팅 문구 뒤에 가려져 있던 ‘제조업의 맨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한다. 누구나 쉽고 빠르게 만들고 버리는 패러다임 속에서, 한 장의 가죽을 위해 수천 번의 실험을 거듭하고 그 공정을 투명하게 후배들의 손에 쥐여주는 일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과감한 혁신이다.
◇5년의 기록, 그리고 다음 세대를 향해 열어젖힌 문
이번 숙련기술 전수자 선정은 정윤호 대표가 그려온 장기적인 청사진의 정점을 찍는 성과다. 화려한 수식어나 일회성 스포트라이트에 기대지 않고, 국가가 공인하는 제도적 틀 안에서 실질적인 기술 대물림의 시스템을 구축해 냈기 때문이다.
정 대표의 의지는 이제 작업실 문밖을 향해, 한국 제조 산업의 다음 세대를 비출 해답을 찾아 움직이고 있다.
“명장이라는 타이틀이나 전수자라는 이름이 내세우기 위한 감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쥐고 있던 펜을 후배의 손에 쥐어주고, 그 후배가 또 다른 이에게 당연하게 건넬 수 있는 문화적 토양을 만드는 것. 그것이 지금 내가 기꺼이 짊어져야 할 마지막 소임이다”
빠름과 효율만이 가치로 추앙받는 시대, 여전히 느린 속도로 가죽의 결을 다듬으며 자신의 노하우를 아낌없이 내어주는 정윤호 대표의 발걸음은 한국 패션 산업의 뿌리가 지향해야 할 본질적인 가치를 오롯이 증명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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