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주일에 한 번 나가는 색소폰 연주 모임은 회원 40여 명 중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어린 여성들이다. 연습실에 들어서면 저마다 다정하게 건네는 인사 속에 “오빠”라는 호칭이 섞여 들어올 때, 나는 묘한 안도감을 느낀다.
가끔 회원들이 내 이름이나 딱딱한 직책을 부르거나, 너무 격식을 차려 “오라버니”라고 부를 때가 있다. 그러면 나는 괜히 짐짓 장난스레 엄포를 놓는다. “아니, 오라버니 말고 ‘오빠’라고 부르라니까!”
격식 차린 호칭보다 친근하고 부드러운 “오빠”라는 소리가 훨씬 좋기 때문이다. 어쩔 땐 그 소리 한 마디에 온몸이 찌릿찌릿하고 심장이 두근거리기까지 한다. 여동생이 자그마치 넷이나 되는데도 말이다. 단체 카톡방에 “내가 모임에 나가는 중요 이유 중 하나는 오빠 소리 듣고 싶어서”라고 농을 던졌더니, 지인들은 일상에 활력이 되는 참 건강하고 멋진 취미 생활이라며 함께 웃어주었다.
‘오빠’라는 말에는 신통한 힘이 있다. 뇌에서 도파민이 샘솟게 하고, 든든한 보호자이자 성숙한 삶의 선배로 인정받는 듯한 기분 좋은 유대감을 선사한다. 남에게 피해를 주기는커녕 정겨운 삶의 온기를 더해주는 고마운 우리말이다.
그런데 최근 신문 칼럼을 읽다가 씁쓸한 입맛을 다시게 되었다. 이 정답고 참 좋은 호칭이 정치판에만 들어가면 아주 기괴하고 망측한 “마법의 주문”으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보도에 따르면, 어느 정당의 예순을 넘긴 전직 간부는 당 안팎 남성들을 “오빠”라 부르며 불법 정치자금을 받아 챙겼고, 돈을 준 사업가는 법정에서 “훈남 오빠라 부르며 나한테 빨대를 꽂았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또 다른 사례에서는 장관 후보자와 연결된 로비스트가 “오빠한테 하고 싶은 말은, 오빠네 선거가 있지 않나”라며 입에 “오빠”를 달고 살며 청탁을 일삼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오죽했으면 당 내부에서조차 “오빠 주의보라도 발령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자조 섞인 말이 나올 지경이다.
본래 “오빠”는 친밀함과 애정, 그리고 서로에 대한 존중을 담아 마음을 보듬어 주는 소리다. 외국인들까지 그 정겨운 어감에 반해 따라 부를 만큼 낭만적인 우리말이다. 드라마와 노래를 통해 한국 문화에 친근한 이들은 이 호칭을 “형제 같은 친밀함”과 “연인 사이의 다정함”을 동시에 담은 말로 기억한다.
그런 순수한 언어가 권력과 돈, 청탁과 욕망이 얼룩진 정치판으로 흘러 들더니 순식간에 징그러운 불신의 언어로 찌들어버렸다. 삶의 현장에서 나누는 다정한 안부가 아니다. 구린 구석을 덮고 이권에 빨대를 꽂기 위해 남용하는 기만술로 전락해 버린 꼴이다.
언어는 그 말이 쓰이는 맥락에 따라 의미를 얻는다. 같은 “오빠”라도 가족과 연인 사이에서는 온기가 되지만, 권력 관계와 금전 거래가 얽힌 자리에서는 의심의 눈초리를 부르는 도구가 된다. 정치판에서 남용된 호칭은 결국 그 말을 주고받는 관계의 신뢰를 갉아먹고, 일상에서 쓰이는 본래의 의미까지 오염시킨다.
하지만 정치판의 때 묻은 욕망들이 아무리 이 좋은 단어를 망쳐 놓으려 한들, 내 삶의 소소한 기쁨까지 앗아가지 못한다.
나는 이번 주에도 색소폰을 메고 연습실로 향할 것이다. 그리고 “오라버니”라 부르는 회원에게 짐짓 큰소리로 “오빠라고 불러!” 하고 윽박지르며 기분 좋게 도파민을 쏟아낼 것이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정치판의 오빠”가 아니라, 삶을 풍요롭고 즐겁게 가꿀 줄 아는 “진짜 오빠”의 자리를 유쾌하게 지킬 것이다.
호칭 하나에 담긴 온기를 지키는 일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일상의 작은 저항이다. 나는 그 작은 저항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연습실 문 앞에서, 그리고 일상 곳곳에서 “오빠”라는 말이 다시 정다운 온기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문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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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집 ‘날개 작은 새도 높이 날 수 있다’, ‘영원을 향한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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